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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숙 여사와 허 군 할머니가 그리운 까닭 - 허정옥 원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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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숙 여사와 허 군 할머니가 그리운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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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월 3일, 그날은 새봄이 무색할 만큼 날씨가 추웠다. 입학식을 하는 운동장으로 찬 바람이 세차게 달려들었다. 자주색 교복 치마가 펄럭이려 하자 잔뜩 움츠러든 학생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모습을 향해 한복을 곱게 입은 할머니가 잔잔히 미소를 보냈다. ‘아고 내 새끼들, 어쩌면 저리도 예쁠까?’ 하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서 당당하게 하늘 향해 허리를 폈다. 아, 그분이 우리 학교를 설립하신 허 군 할머니셨다.



그때는 밀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이라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쉽지 않은 터였다. 서귀포 지역에는 인문계 고등학교들이 세 군데나 있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겐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집집이 자녀들을 예닐곱씩 낳은 터라, ‘딸만씩 한 것들을 어떻게 학교에 보내랴’ 싶은 게 어머니들의 설움이었다. ‘똘 셋이민 혼 해에 밭 혼 파니썩 산다’는 속담이 은근히 나돌던 시대였다. 


그런데 ‘서귀여자실업고등학교’라는 직업 연계 학교가 생기자 적어도 고민해 볼 여지가 생겼다. ‘고등학교만 보내주면 취직해서 집안을 돕겠다’는 딸들의 애원 또한 심금을 울렸다. 


어머니들의 담대한 결단이 2:1이 넘는 경쟁률을 보이며, 산남지역의 첫 번째 실업계 여학교가 기세 좋게 출범했다. 일본에서 들여온 최신 타자기들이 재봉틀 소리보다 신나게 타타타 함성을 질렀다. ‘한라는 우쭐우쭐 우리의 마음, 신나게 어깨 펴고 자라가 보자’는 교가 소리가 한라산을 울렸다. 


사실 ‘여자들의 못 배운 한을 풀어주자’는 것은, 허 군 할머니의 운명적 결단이었다. 할머니는 1920년대 제주 여인들처럼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고, 10대 중반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재봉공장에서 20대를 보냈다. 귀국한 후에는 양잠·양배추·제충국·감귤 농사 등을 통 크게 벌이며 3만 평 규모의 감귤밭을 일궜다. 


바로 그즈음에 교육감이 유지들을 찾아다니면서, ‘시 승격을 앞둔 서귀포에 여성 교육을 위한 사립고등학교를 건립하자’는 호소를 하였다. 하지만 ‘학교는 설립자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하늘의 뜻이었을까? 마침내 그 소문이 허 군 할머니에게 닿았다. ‘나도 어려서부터 못 배운 게 한이었으니, 내 인생의 마지막 사업인 여성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자 한다’는 결단이 선포되었다.


그렇게 태어난 학교가 어느덧 50주년을 앞두고 있다. 반 백년의 시간 동안 1만3000여 명의 동문이 배출됐고 지역경제를 이끄는 여성 기업인의 산실로 자리했다. 허 군 할머니의 기업가 DNA가 대를 이어 뿌리내린 결실이요, 못 배운 한이 배움의 이유로 승화된 결과다. 


지난 10월 20일, 신성여자고등학교가 개최한 제1회 최정숙 상 시상식에서 허 군 할머니가 주인공이 됐다. ‘허 군님은 평생 피땀 어린 인고로 점철된 고단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불굴의 정신과 강인한 생활력으로 험난한 세상이란 바다를 헤쳐 커다란 꿈을 이룩한 여장부로서 제주 여성의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선언이 제주에 퍼졌다. 


학교를 세우면서 어려움을 걱정하는 자녀들에게, ‘우리 희생허연 여러 사람 조암신예. 우리만 잘 살민 되느냐? 다 같이 잘 살아사주!’라고 하셨던 할머니. 제주를 창조한 설문대 할망, 백성을 먹여 살린 만덕 할망처럼 우리들 가슴속에서 영원히 빛나시리라. 시대를 같이 사셨다면, 우리는 최정숙 여사와 함께 허 군 할머니를 애국지사로 마주하지 않았을까. 


허정옥 제주장수복지연구원장/논설위원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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