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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세의 그늘 2024-07-04
제주장수복지연구원 http://jejuwellbeing.co.kr/c/?74  조회 4705 댓글 0
 

 

허정옥 제주장수복지연구원장/논설위원


아버지는 왜 대문 밖에다 플라타너스를 심으셨을까? 하늘이 무색하게 아름드리로 자라서 넓적한 잎사귀가 햇볕을 가릴 즈음, 우리는 보았다. 숲 그늘 드리운 나무에 기대어 쉴 수 있기를 바라는 여름날의 소망을. 영순네 퐁낭(팽나무)이나 옥자네 목코실(멀구슬)보다 키가 커서 그런지 아이들은 ‘미국낭’이라 불렀다. 


기실 플라타너스는 1910년경 미국에서 들어왔다. 바다에서 신나게 물장구치다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모여드는 동네 아이들에게 나무는 부챗살 같은 손을 흔들어 흐르는 땀을 식혀주었다. 어머니도 물질을 마치고 들어오는 날에는 우영팥에서 대죽(사탕수수)을 베어다 간식으로 주셨다. 그 땀과 바다 내음이 뒤섞인 어머니의 체취와 단물이 입안 가득 맴돌던 여름날의 추억이여!


어느덧 102세가 되신 어머니가, “무사 영 늘검시니? 일어사지 못허키여”라며 주저앉는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기저귀를 가는 게 일상인데도 언제나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밥 한술을 삼키려고 애를 쓰는 연하곤란은, 아, 어쩔 수 없는 늙음의 설움이다. 요양보호사교재에 의하면, 숟가락으로 떠먹이는 치매 대상자는 한 번에 조금씩 먹이고 음식을 삼킬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하루 종일 졸거나 깨어나면 웅얼거리고 아무 데나 침을 뱉는 어머니에게 주위에서는 콩 고르기를 권한다. 문제는 ‘오몽(일)해사 밥을 먹주!’라며 눈에 불을 켜고 사력을 다하는 열심이다. 우리를 밭고랑에 앉혀 놓고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 하시던 어머니의 노동이 사뭇 슬프다. 


가슴 속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즈음, “여름엔 씨원헌 물이 복이여! 재게 목욕해영 혼 시간만 자라” 하신다. 일은 당신이 하셨는데 딸 보고 쉬라는 건 치매에 가려진 어머니의 사랑일까. 


2024년 5월 기준 제주도 인구는 67만2563명,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12만3343명으로, 인구의 18.3%에 이른다. 이토록 무르익은 고령사회에서 100세 이상의 초장수 노인은 265(남 18, 여 247)명이다. 


요즘은 제주 전역 노인대학에서 ‘장수의 비결’을 특강하고 있다. 순전히 102세 어머니가 특종세상과 인간극장 등 TV 프로에서 해녀 할망의 노익장을 과시한 덕분이다. 그렇게 담대한 어머니에게도 가슴 졸이는 염려가 있으니, 바로 요양원이다.

 
미국에서 17년을 사시다 아버지를 장사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요양원은 보내지 말아달라’는 게 당부였다. 아파서 병원에 간다더니 요양원으로 옮겨지자 얼마 없어 부고장이 날아드는 사회에서 요양원은 죽음을 예고하는 마지막 장소다. 사실 노인들 대부분은 건강하게 일상을 집에서 보내다가 편안하게 떠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임종의 16%만 집이고, 77%는 시설에서 이루어진다. 미국·영국·독일 등은 재택 임종이 50%다. 하버드대학의 관련 연구에 의하면 장수의 비결은 적극적인 사회적 유대관계에 달렸다. 뉴욕타임스 또한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이 주목할 만한 사망 요인임을 경고한다. 제주도 할머니들도 집에서 이웃과 함께 끝까지 살기를 바라시는 터. ‘꽃 핀 나무 아래서 온갖 냄새들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노년은 늙기가 힘들어서 허덕지덕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린다’라는 김훈 작가의 기원이 새삼 두 손을 모으게 한다. 


차제에, 집에서 여생을 보내는 노인들을 새로운 삼다(三多)로 바꿔보면 어떨까.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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